배롱나무---도종환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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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자 산정 댓글 0건 조회 43회 작성일 26-04-06 15:18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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배롱나무를 알기 전까지는  

많은 나무들 중에 배롱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  


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을 피워놓고는  

가녀린 자태로 소리 없이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  

남모르게 배롱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  

그 뒤론 길 떠나면 어디서든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  


지루하고 먼 길을 갈 때면 으레 거기 서 있었고  

지치도록 걸어오고도 한 고개를 더 넘어야 할 때  

고갯마루 꽃그늘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기도 하고  


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 다른 길로 접어들면  

건너편에서 말없이 진분홍 꽃숭어리를 떨구며 

서 있기도 하였습니다  


이제 그만하던 일을 포기하고 싶어  

혼자 외딴섬을 찾아가던 날은  

보아주는 이도 없는 곳에서 바닷바람 맞으며  

혼자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  

꽃은 누구를 위해서 피우는 게 아니라고 말하듯  


늘 다니던 길에 오래전부터 있어도 보이지 않다가  

늦게사 배롱나무를 알게 된 뒤부터  

배롱나무에게서 다시 배웁니다  


사랑하면 보인다고  

사랑하면 어디에 가 있어도  

늘 거기 함께 있는 게 눈에 보인다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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